전투기를 비롯해 각종 기계장치에 그려진 식별 사인들입니다.
주변 대비 명확하게 구분되는 색과 형태,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커다란 문자로 의미를 설명합니다.
20대 후반을 지나면서부터 기억력이 눈에 띄게 감퇴했다고 느끼는 것은 아마도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기억력이 서서히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겠지만,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단순히 기억력만 떨어졌다기보다는 그만큼 이 세상에 기억해야 할 것, 그리고 판단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고 그 구성 요소들도 복잡해졌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스크탑, 랩탑을 비롯해 두세 대의 컴퓨터와 스마트 폰과 같은 모바일 기기,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와 같은 미디어 기기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 쌓이기 시작하면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케이블과 더불어 각종 수치들이 함께 우리를 에워쌉니다. 직접 눈에 보이는 케이블이야 끼워 보고서 맞는지 확인하면 되지만, 마치 스파게티 2인분을 바닥에 쏟아놓은 것 마냥 여러 종류의 비슷한 케이블들이 늘어놓여 있는데 그 중 유니크한 하나만을 찾아내야 하는 경우, 그리고 직접 연결해 확인해 보기 전에는 정확한 값이나 상태를 알 수 없어 구분이 어려운 많은 것들은 무척 곤혹스럽지요. 게다가 이런 일들로 인해 실수를 하거나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 점점 답답하게 느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항공기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도 항공대학을 나왔습니다. 항공기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대부분 관심을 가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조종석 인터페이스였지요. 초창기에는 요즘의 소형 자동차보다도 간단한 기본적 계기들만을 탑재했던 비행기들은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급격히 성능이 올라갔고 부가기능도 그만큼 많아졌습니다. 그에 걸맞게 조종석은 너무나 복잡한 기계장치들, 스위치들로 가득 차게 되었지요. 그래서 조종사의 수는 늘어갔습니다. 조종사, 부조종사, 항법사, 항공 기관사... 이렇게 많은 인원이 탑승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제한된 인지 능력의 문제로 실시간으로 효율적으로 구분하여 다룰 수 있는 계기들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제너럴 다이내믹스사가 F-16 전투기에 (우주선에서 내려온 기술인) Fly-by-Wire 기술을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비행기의 조종석 계기들은 전자적 연결 방식으로 대체었습니다. 전자기술의 도움으로 과거의 기계식 조종석은 90년대의 글래스 칵핏이라 불리는 멀티 스크린 형태의 조종석으로 큰 폭으로 변했지요. 덕분에 조종사들의 업무 부하는 대폭 줄어들었고, 과거 2~3인이 담당하던 임무를 1인이 충분히 담당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하는 조종사의 수는 다시 줄어들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공기는 한 번의 작동 실수로도 큰 인명손실과 경제적 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 복잡한 기계장치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안전한 비행을 위해 점검해야 할 부분들도 많아서 수많은 표준 체크리스트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조종사의 부담을 계속 덜어주기 위한 조종 인터페이스도 계속 개선되고 있지요. 이러한 항공기의 운용 특성 상 조작 인터페이스, 그리고 표식들은 특별히 명확하게 표시되어야 합니다. 위기 상황, 흥분으로 조종사의 인지능력이 흐려진 상태 하에서도 매 순간순간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누구라도 어이없는 실수 없이 장치를 조작하고, 사전에 작동 위험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죠. 장치들에 부착되는 사인들, 그리고 텍스트들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 속에서도 통용되도록 주로 국제공용어인 영어로, 그리고 외형부터 가능한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집니다. 많은 기계들에 비슷한 디자인이 사용되고 있지만, 부품의 방향을 바꾸어 끼우거나 커넥터를 잘못 접속하지 않도록 하는 배려는 기본적이지요. 다소 유치해보이지만 대형 여객기의 기어 업/다운 레버는 끝 부분에 바퀴 모양 (실제로 바퀴가 돌아가기까지 하는) 이 달려 있어서 눈으로 보았을 때, 혹은 손 끝을 갖다 대기만 해도 이것이 비행기의 착륙 바퀴를 제어하는 레버임을 인지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또한, 비행기의 등화를 조정하는 스위치들은 마치 활주로의 유도등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사방에 가득 늘어놓여진 수많은 컨트롤 패널들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아무리 자동화 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글래스 칵핏으로 최첨단의 정보 디스플레이 기술이 동원되었다고 해도, 이러한 노력들은 오히려 더욱 중요해집니다. 인간이란 무한히 정보를 퍼붓는다고 늘 잘 감당하고 처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기억해야 하는 값, 또는 주의해야 하지만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내용들은 관련된 색의 플래그 포스트잇을 이용 굵은 펜을 이용해 손글씨로 적어 기록하고 아예 셀로판 테이프를 사용해 붙여 버리고 있습니다. 케이블에는 줄줄이 꼬리표를 달아 두기도 하고요, 소모품인 배터리 같은 경우 아예 유성 펜으로 표면에 일련번호를 써서 구분합니다. 비행기의 표면을 자세히 보면 각종 액세스 패널 옆에 수많은 글씨와 사인들이 바로 보이도록 붙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이폰과 같이 매끈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기기에도 결코 주저하지 않아요. 몇몇 사람들은 저에게 묻는답니다.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쓰고 있어?" 혹은 "겨우 예쁘게 만들어 놓은 기계인데 너무 흉칙하지 않아?" 라고 말이죠. 그러나 이런 식으로 표시해 두면 순간순간 기억을 짜내기 위한 고민의 시간 단계를 바로바로 건너뛰고 목표에 더욱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워낙 게으르기 때문에 한두 가지 걸림돌만으로도 귀찮아져서 전체 작업을 포기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문제도 줄어듭니다. 아울러 제 장비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라도 겉면에 적힌 표시를 보고 제게 묻지 않고도 관련된 판단을 상당한 수준까지 할 수도 있지요. 익숙해지면 대단히 편리한, 공개된 정보 하에서 작업하는 습관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책상 밑에서 수많은 전선들을 이리저리 당겨 보며 헤매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제가 굳이 셀로판 테이프와 손글씨를 쓰는 이유는, 우선은 그것이 가장 쉽고 빠르면서도 비용이 적게 들고, 확실하게 부착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더 예쁘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런 부분까지 시간을 소모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예쁘게 표현하기 이전에 확실하게 인식되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고, 어차피 저 혼자만을 위한 것이기에 시간을 조금 더 아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직업을 가지기 이전 약 10년 동안 컴퓨터를 사용하는 비주얼 그래픽, 휴먼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로 일했었습니다. PC와 모바일 기기를 오가며 다양한 소프트웨어와 웹 페이지들의 기능과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해왔더랬지요. 디자이너 경력이 쌓여가면서 인터페이스는 시각적으로 예쁜 모양보다 인지적 측면으로 더 우수한 디자인이 더욱 가치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물론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지속가능성까지 갖춘다면 최고 디자인이죠) 그러나 디자인을 직업으로 하지 않게 되면서, 제 스스로 철저한 사용자가 되면서 아직도 생각이 부족했다는 점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기존의 기능들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부터 지극히 어려운 것이라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과거 수많은 디자인 미팅에서 인터페이스의 부실함 문제를 사용자 학습 유도로 해결해보려고 노력했던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제작자가 편하자고 사용자들을 고생시켰던 것인 것이었죠.
선배 디자이너 입장에서 후배들이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 때 중요한 부분에서 너무 작은 글꼴이나 어려운 영어 표현을 사용한다던가, 혹은 구분되어야 하는 항목들을 비슷비슷한 톤으로 구성해 나가면 늘 강하게 지적을 해 주었습니다. 디자인은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지 유리 케이스 안에 보관하고 구경만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알록달록한 색과 통일되지 않은 형태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인지적 능력의 한계를 넘기는 지저분한 디자인이 됩니다. 사람이 한 번에 큰 오류 없이, 그리고 편안하게 인지할 수 있는 구분 방법과 경우의 수는 사실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결국 일단은 한 번에 표시해야 하는 양을 가능한 줄이는 것이 답이었죠. 사실 애플사의 제품들은 이와 같은 디자인에 무척 강해서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플사의 제품에 적용된 사용자 경험 디자인의 레벨은 어떤 경우에는 애플적인 사고방식과 행동패턴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상적일지 몰라도 오히려 처음 사용자들에게는 너무 미니멀한 감이 많아 개인적인 철학에 모두 부합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부분에 바로 사인을 붙이고 구분하는 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쪽의 디자인이 더 나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얼마 전 지켜본 재미있는 사례로, 서울 지하철 9호선의 각종 사인의 디자인이 있습니다.사실 9호선은 기존의 도시철도에 작용되었던 내부의 안내 디자인의 주요 요소들을 과감히 폐지하고 대부분의 사인들을 벽면에 빌트인 형태로 디자인하여 한 눈에 미니멀하고 단정한 실내공간 디자인을 만들어 낸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에서 너무 작은 글씨를 사용했거나 대부분의 사인들을 모노톤으로 표시한 덕에 많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화장실을 찾지 못한다던가 하는 문제가 보고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임시로 프린트해 부착하는 안내 사인들도 점점 늘어갔습니다. 그래서 작은 글씨를 다시 키우고, 적어도 화장실에서만큼은 다시 빨강과 파랑으로 구분한 화장실 사인을 바꾸어 부착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리모델링되고 있는 서울의 지하철의 기존 역사들에서는 과거 9호선에서 했던 시행착오들을 다시 하고 있더군요. 보기에는 예쁩니다. 그러나 글씨는 작아지고 시인성이 떨어집니다. 사실 기존의 지하철 글꼴은 세련됨은 좀 덜 할지 몰라도 수평으로 빠르게 지나치는 상황에서도 글씨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세심히 디자인된 것이었는데요, 서울체로 모두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실수에 대한 노하우는 공유되지 않는 것일까요?
스마트폰 열풍이 일반화되면서, 이제 더 많은 이들이 다양한 인터페이스와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더 사람들이 '화려한 것만이 좋은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가고 있고요. 사실 모바일 기기는 직접 손에 넣고 사용해보지 않으면 지극히 섬세한 UX의 묘미를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직접 사용해 보면 개선이 필요한 부분과 왜 개선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당장 드러나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어떤 측면에서 개선이 적절하지 않은지 등을 명확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느낌을 명확한 개선 방안으로 만들고, 그 개선 효과를 구체적인 값으로 가늠해보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비록 실무 디자이너로서 일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작업들을 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생각과 판단을 하고, 한편으로는 다소 동물적 인지능력 레벨에서의 도움을 주는 레이블 붙이기 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회사에서 근무하는 과정에서 스마트폰에 직접 종이를 대어 화면 밖으로 연장되는 추가 메뉴를 만들어 보거나, 아예 처음부터 종이를 자르고 붙여가며 인터페이스의 프로토타입 모델을 만들고 테스트하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사실 좋은 디자인이란 어느 분야에나 통용되는 가장 중요한 마케팅 방법이기도 하죠.